‘혈액암 투병’ 배우 안성기 인생 영화 BEST 5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를 꼽으라면 누굴 먼저 떠올리나요?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곧바로 안성기를 떠올렸습니다. 물론 더 잘 생기고 연기 잘 하는 배우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국민 배우’로 찬사 받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죠. 특히 그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다고 봅니다.

경력이 어마무시합니다. 1952년생인 그는 5살 때인 1597년 <황혼열차>로 데뷔합니다. 이후 아역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웬만한 영화는 다 독차지했다고 볼 정도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영화사에 남을 굵직한 작품들에 이름을 올리며 배우 안성기의 가치를 드높입니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연예인에게 덧씌워진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배우이기도 합니다. 일단 병역부터 깔끔합니다. 한국외대를 나온 그는 ROTC 장교로 병역을 마쳤습니다. 사건사고를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정한 이미지 그대로죠. 왜 많은 배우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근래 들어 ‘혈액암 투병’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대종상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는데 직접 참석은 못하고 영상으로 안부를 전해왔죠. 그는 “제 건강, 너무 걱정들 많이 해주시는데 아주 좋아지고 있다”며 “새로운 영화로 여러분들을 뵙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영화를 통해 늘 가까이 있다 보니 그도 늙어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나 봅니다. 그 자신도 “오래오래 영화배우로 살면서 늙지 않을 줄 알았고, 또 나이를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 시간과 나이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무토록 쾌차를 기원합니다.

출연작이 워낙 많아 대표작을 뽑기도 어렵습니다. 어느 한 작품도 허투루 연기하지 않았을 테니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본 영화 가운데 인상에 남은 작품을 중심으로 BEST 5를 뽑았습니다. 선정해 놓고 보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들의 작품이네요.

너무나도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아닌데’ 혹은 ‘이 영화는 왜 빠졌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영화 중 5개를 꼽자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처 보지 못한 영화도 적지 않고 오래 전 볼 당시 감정에 따른 선정이라 그러려니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바람 불어 좋은 날 (Good Windy Day·1980)

바람 불어 좋은 날. 이영호 김성찬 안성기
바람 불어 좋은 날. 이영호 김성찬 안성기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장호 감독 작품으로 아역배우 안성기가 성인 연기자로 변신에 성공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해 대종상 영화제에서 감독상(이장호)과 신인남우상(안성기)을 수상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어둠의 자식들>(1981) <꼬방동네 사람들>(1982) <무릎과 무릎사이>(1984)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등 여러 작품을 함께 했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이 시작된 뒤 서울을 배경으로 고속성장의 이면을 사실적으로 다뤘다. 시골에서 상경한 중국집 배달부 덕배(안성기), 이발소 견습 이발사 춘식(김성찬), 여관 종업원 길남(이영호)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큰 꿈을 안고 서울로 왔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세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말할 것도 없고, 김성찬의 다소 허풍스럽고 과장된 몸짓이 웃음과 함께 슬픔을 자아낸다. 이장호 감독의 동생인 이영호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덕배의 상대역인 여공 춘순에 임예진, 상류층 병희에 김보연이 출연했다.

■ 고래사냥 (Whale Hunting·1984)

고래사냥.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고래사냥.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바람 불어 좋은 날> 조감독을 맡았던 배창호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 군부독재 시절 청춘들의 좌절과 방황을 신랄한 풍자와 재치로 담아냈다. 개봉 당시 서울 관객 43만명으로 1984년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안성기는 청춘의 아픔을 감싸 안는 자칭 도사라는 거지 민우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앞서 두 사람은 <꼬방동네 사람들>(1982) <철인들>(1983) <적도의 꽃>(1983)에서 호흡을 맞췄고, 이후 <깊고 푸른 밤>(1985)으로 대종상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각각 수상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꿈>(1990) <천국의 계단>(1992) <흑수선>(2001) 등을 함께 했다.

가수 김수철이 짝사랑하던 여대생에게 거절당한 후 거리를 방황하는 소심한 대학생 병태 역을, 배우 이미숙이 사창가에서 포주에게 구박 받는 벙어리 여인 춘자역을 맡았다. 안성기가 맡은 민우는 병태와 함께 춘자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는다. 현실 세계에서 찾기 힘든 괴짜 중의 괴짜이지만 한편으로 방황하는 청춘들이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 개그맨 (Gagman·1989)

개그맨. 안성기 황신혜 배창호
개그맨. 안성기 황신혜 배창호

한국영화계 대표적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으로 배창호 감독이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배 감독의 조연출로 일했던 이 감독이 자신의 첫 영화에 ‘창호 형’을 끌어들인 셈이다. 삼류카바레 개그맨 이종세 역을 맡은 안성기의 연기는 한마디로 기가 막힌다.

배우 안성기의 출연작 중 걸작이 많은 배경에는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한국의 뉴시네마 감독 계보가 자리한다.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변주하는 젊은 감독들에게 안성기는 그야말로 안성맞춤 배우로 여겨졌다. 이명세 감독과의 인연은 <남자는 괴로워>(1995)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형사: Duelist>(2005)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천재 영화감독이라 생각하는 카바레 개그맨 이종세, 영화배우가 꿈인 변두리 이발소 주인 문도석(배창호), 건달들을 피해 극장으로 들어와 종세를 만나는 오선영(황신혜). 이들 3인조는 영화 제작을 위해 시골 은행을 터는 등 범행을 이어가다 경찰 수배를 피해 도주하지만 결국 무장한 경찰에 포위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도석의 총에 맞아 쓰러진 종세, 눈을 떠보니 도석의 이발소 의자에 앉아 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은 1년 뒤 개봉한 배창호 감독의 <꿈>(1990)으로 이어진다.

배창호-이명세는 <개그맨>과 <꿈> 각본을 함께 썼다. <꿈>은 이광수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개그맨>에서처럼 안성기와 황신혜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를 봤을 당시 왠지 모를 슬픔이 묵직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 칠수와 만수(Chil-su and Man-su·1988)

칠수와 만수. 박중훈 안성기
칠수와 만수. 박중훈 안성기

<이장호의 외인구단> 조감독을 맡았던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 박 감독은 이 영화로 1989년 대종상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안성기와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베를린 리포트>(1991)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를 함께 했다.

안성기는 장기 복역 중인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고통 받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만수 역을 맡아 동두천 하우스 보이의 아들로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간 누나의 초청장을 기다라는 칠수 역의 박중훈과 호흡을 맞췄다.

안성기-박중훈 명콤비의 탄생을 알린 영화다. 뛰어난 연기력에 소탈한 성격까지 닮은 두 배우는 이후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라디오 스타>(2006)에서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거대한 옥외 광고판에 페인트를 칠하던 두 사람은 간판 작업을 마친 후 그 곳에서 장난을 치며 푸념을 털어 놓는다. 그런데 이 모습을 자살 시도로 오해한 사람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소외된 두 청년의 시선으로 1980년대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 라디오스타 (Radio Star·2006)

라디오스타. 안성기 박중훈
라디오스타. 안성기 박중훈

<왕의 남자>(2005)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준익 감독이 이듬해 개봉한 영화. 개봉 한 달여 만에 160만 관객이 찾아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영화 기획·제작자로 이름을 알려왔던 이 감독이 <황산벌>(2003)과 <왕의 남자>에 이어 감독·제작을 맡았던 영화로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2006년 청룡영화상에서 안성기·박중훈이 나란히 남우주연상을, 2007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안성기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는 방준석 음악감독이 음악상을 수상했다. 2022년 3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방 감독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음악인이다.

안성기-박중훈 콤비가 또 한 번 맹활약했다. 한물 간 가수왕 출신 방송인 최곤(박중훈)과 그의 오랜 동반자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가슴 뭉클한 우정을 다뤘다. 가수가 주인공인 만큼 영화 속 음악이 좋다. 특히 박중훈이 부른 ‘비와 당신’은 영화 개봉 후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방준석 감독이 만든 곡으로 배우 박중훈을 가수처럼 보이게 만든다.

‘넌 내게 반했어’로 유명한 인기 락밴드그룹 노브레인이 영월의 동네 밴드로 등장해 유쾌함을 선사한다. 가수왕 최곤의 열렬한 팬으로 나오는 보컬 이성우의 연기가 볼만하다.

무엇보다 안성기와 박중훈의 표정 연기가 압권이다. 눈빛만으로 서로에 대한 아쉬움과 애절함이 절절히 전해진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저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는 것을. 별은 빛을 받아 반사한다. 인생도 그렇다. 나를 빛나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 혹은 내가 누군가를 빛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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