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맺어준 ‘이선균·정유미’ 커플의 슬픈 인연
제74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신작 ‘여행자의 필요’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홍상수 감독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 이름이 알려진 영화인이다.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작품상인 은곰상만 벌써 다섯 차례 수상했다.
다작을 하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여행자의 필요’는 그의 31번째 장편영화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했으니 매년 1편 이상 영화를 만든 셈이다.
제작 시기에 따라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들이 있다.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까지 이선균과 정유미가 홍 감독 영화에 여러 차례 나왔다. 묘하게 시기가 겹친다. 5년여 동안 이선균이 5편, 정유미가 6편 출연했다.
특히 둘이 주연을 맡아 함께 나온 영화가 3편이나 된다. 그것도 남녀 상대역이다. 홍 감독이 이선균·정유미 커플을 일찌감치 연결해 준 셈이다. 물론 홍상수 영화에서 알콩달콩 사랑스런 연인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치 잘못된 만남이냥 서로 엇갈리기만 하는 슬픈 인연이다.
■ 첩첩산중 (Lost in the Mountains·2009)
31분짜리 단편영화.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에 함께 소개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코마’, 라브 디아즈 감독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를 묶어 110분의 옴니버스 영화 <어떤 방문>으로 개봉했다.
작가 지망생 미숙(정유미)은 형부에게 선물로 받은 중고차를 몰고 전주에 있는 친구 진영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사정이 생긴 진영 대신 스승이자 옛 애인인 상옥(문성근)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우연이 상옥이 친구 진영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홧김에 또 다른 옛 애인 명우(이선균)를 전주로 부른다. 네 남녀가 술자리와 여관으로 이어지는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식당에서 재회한다.
■ 옥희의 영화 (Oki’s Movie·2010)
홍상수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 4개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옴니버스 영화라기보다는 쭉 이어진 장편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개봉을 앞두고 영화홍보사 측은 ‘4악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음악’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영화가 4악장의 교향곡이라면 1악장 ‘주문을 외울 날’은 곤경에 처한 시간강사이자 독립영화감독인 30대 진구(이선균) 이야기다. 우연히 학과장의 비리에 관한 소문을 들은 후 회식에서 술에 취해 직접 소문에 대한 진실을 묻다가 핀잔을 듣는다. 2악장 ‘키스 왕’은 20대 영화과 학생 진구가 같은 과 동기생 옥희(정유미)에게 구애하는 이야기다.
3악장 ‘폭설 후’는 50대 영화감독이자 시간강사인 송 감독(문성근)이 학생 진구와 옥희를 가르치는 강의실 풍경을 담았다. 영화의 제목과 같은 4악장 ‘옥희의 영화’는 영화과 학생 옥희가 만든 영화 이야기다. 1년 사이를 두고 아차산에 함께 올랐던 다른 남자와의 경험을 영화적으로 구성했다.
■ 우리 선희 (Our Sunhi·2013)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이 흥미진진한 영화. 영화과 졸업생 선희(정유미)는 내성적이지만 한편으로 용기도 있는 매력적인 여자다. 한없이 예쁘고 귀여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해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런 그녀가 세 남자를 만난다.
열정과 불안과 미련을 동시에 지닌 초짜 감독 문수(이선균), 온화하고 진지한 인상의 영화과 교수 동현(김상중), 무뚝뚝하지만 현명한 마음을 가진 선배 감독 재학(정재영). 선희와 세 사람은 좋은 의도로 삶의 충고를 해준다.
저마다 관계와 감정에 서로 모르는 특별함이 있다. 그 관계와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돌고 돈다.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나. 각자 느끼는 대로 삶은 이어진다. 시나리오 없이 영화를 만드는 홍 감독만의 특색이 잘 드러난 영화라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