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난 장국영 인생영화 BEST 5
2003년 4월 1월 만우절, 거짓말 같은 뉴스가 전해졌다. 20세기 말 홍콩 영화 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인 장국영(張國榮)의 죽음이다.
이 대체불가 배우의 자살 소식은 한때 홍콩 느와르에 푹 빠졌던 ‘홍콩 키드’의 가슴을 찢어놓듯 아리게 했다.
장국영은 1956년홍콩 구룡반도에서 태어나 1977년 가수로 먼저 데뷔한 후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1980~1990년대 전성기를 맞은 홍콩 영화 최고의 스타로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87년 홍콩 느와르의 포문을 연 ‘영웅본색’은 장국영 팬덤의 서막이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의 인생영화 베스트(BEST) 5를 소개한다.
■ 천녀유혼 (A Chinese Ghost Story·1987)
배우 장국영의 이름을 뇌리에 각인시킨 기념비적 영화. 물론 왕조현을 처음 알게 돼 여배우 사진을 사다 모으는 바보짓을 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극장에서만 5번 넘게 봤던 걸로 기억한다. 왕조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공포와 멜로를 뒤섞은 전형적인 판타지 영화다.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순진무구한 남자와 절세미인인 여자 귀신의 사랑 이야기다. 장국영이 남루한 행상으로 수금을 하러 다니는 영채신 역을, 왕조현이 창백한 얼굴을 한 미모의 귀신 섭소천 역을 맡았다.
왜 이 영화에 끌렸을까. 사실 영화적 완성도가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 홍콩식 특수효과도 탄성을 자아내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문이 닳도록 보고 또 본 이유는 사춘기 소년의 백지 같은 감성에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한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 아비정전 (Days Of Being Wild·1990)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아비(阿飛)의 일대기(正傳)를 담은 영화. 왕가위 감독이 ‘열혈남아’(1988)에 이어 두 번째로 내놓은 작품으로 다소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본 후 잔상이 오랫동안 남는다.
특히 아비(장국영)가 속옷 차림으로 맘보춤을 추는 장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바람둥이지만 외로운 역설적 현실이 아비의 우수에 찬 표정에 잘 드러난다. 아비가 사랑하는 여인 수리진 역은 장만옥이 맡았다.
만남을 갈망하면서도 이별을 준비하는 상처입은 청춘의 표상. 지상에 닿지 못한 채 어디론가 계속 날아가야만 하는 ‘발 없는 새’의 운명. 영원히 잊지 못할 1분의 추억만 간직한 채 허공을 떠도는 유랑자의 삶. 1997년 중국으로 반환하게 될 홍콩의 현실을 담은 영화로도 해석된다.
■ 패왕별희 (Farewell My Concubine·1993)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 연극으로 유명한 ‘경극’을 무대로 엇갈린 사랑과 운명을 담은 영화. ‘붉은 수수밭’(1989)의 장이머우 감독과 함께 중국 5세대 대표주자인 천카이거 감독의 최고 역작이다. 제4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경극 패왕별희에서 여성인 우희를 연기하는 두지와 항우를 연기하는 시투는 세상에 둘도 없는 형제와 같은 막역한 사이다. 장국영은 시투를 남몰래 연모하는 비련의 주인공 두지 역을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게 연기한다. 시투 역은 중국 본토 출신인 장풍의가 맡았다.
엇갈린 사랑과 질투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과정에서 베이징 정변, 중일전쟁, 국공합작, 국민당 패퇴,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근현대사가 상처를 후벼판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극 배우의 설자리는 좁아졌고 두지는 무대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 동사서독 (Ashes Of Time·1995)
장국영이 왕가위 감독과 함께 한 두번째 영화.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의 ‘사조영웅전’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당시 잘 나가는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장국영을 비롯해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장학우 등이 저마다의 아픔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장국영은 무협소설 좀 읽었다면 모를리 없는 ‘서독’(西毒) 구양봉 역을 맡았다. 사랑하는 여인(장만옥)을 뒤로 한 채 검객의 길을 걸은 그는 사막에 여관을 개업해 돈을 버는 냉소적인 인물이다. 사랑으로 인해 슬픈 상처를 간직한 ‘동사’(東邪) 황약사 역은 양가휘가 맡았다.
서로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꼬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였나. 목숨을 걸 만큼 연모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슬픈 인연으로 끝을 맺는 것인가. 하지만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 생각이 난다.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이름의 술이 필요한 이유다.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998)
장국영의 방황과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영화. 그가 죽기 5년 전에 개봉했다.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1997년이 아닌 1998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종로 한 극장에서 절친과 둘이 봤는데 동성애자로 오해를 샀던 기억이 난다.
왕가위 감독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장국영과 양조위가 주연을 맡았으니 놓칠 수 없는 영화였다. 전작들에 비해 살짝 실망스럽긴 했다. 왕가위를 떠나보낼 때가 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여운을 남기긴 마찬가지였다.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의 사랑과 이별을 섬세하게 담았다. 사소한 다툼으로 이별하고, 다시 만나 서로를 위로하다, 변심이 두렵고 구속이 힘들어 결국 헤어지고 마는 두 사람. 왜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걸까. ‘Happy Together’는 정말 힘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