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 배우’ 남궁원 별세…파란만장했던 영화 인생
서구적 외모로 사랑받았던 원로 배우 남궁원(본명 홍경일)씨가 별세했다. 향년 90세.
최근 몇 년간 폐암 투병을 이어온 남씨는 5일 오후 4시께 서울아산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 배우’의 대명사, 남궁원씨의 영화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신상옥 감독과 배우 남궁원
한국영상자료원(www.kmdb.or.kr) 등에 따르면 남궁원씨는 193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는 서울에서 보냈다. 중앙고를 졸업한 후 한양대 화공학과를 다니던 시절부터 잘생긴 외모로 유명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본인은 배우가 아닌 교수나 외교관을 꿈꿨다. 실제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로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궁암 3기 진단을 받아 돈이 필요해지자 장남으로서 유학을 포기하고 친구의 아버지인 아세아영화사 이재명 사장을 찾았다.
그렇게 영화계에 입문해 1958년 노필 감독의 ‘그 밤이 다시 오면’으로 데뷔했다. 이듬해 그의 영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신상옥 감독의 ‘자매의 화원’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신 감독의 영화사 신필름 전속 배우로 ‘연산군’(1961) ‘빨간 마후라’(1964) ‘내시’(1968) 등에 출연하며 스타로 부상했다.
홍콩에서 영화 보며 연기 연습
배우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닌 만큼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1961) ‘부활’(1962) ‘닥터 지바고’(1963) 등 연극 무대에 연이어 오르며 연기를 배우려 노력했다. 데뷔 초기 연기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정면 돌파한 것이다.
남씨는 2015년 12월 YTN과의 인터뷰에서 “연기의 연자도 몰랐고 처음 출연을 하는데 카메라가 저렇게 앞에 있는데 카메라 렌즈가 호랑이 눈알같이 나를 향해 있는데 도저히 용기가 안 나더라”며 “NG를 10번, 15번씩 내면서 촬영을 했다”고 밝혔다.
연기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건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됐다. 신상옥 감독이 합작 영화를 만들기 위해 홍콩에 머물게 됐는데 여기서 틈틈이 영화를 보며 연기 연습을 했고 배우로서 많은 성장을 했다고 한다.
남궁원과 미남 배우의 역설
수트가 잘 어울려 ‘국제간첩’(1965) ‘극동의 무적자’(1970) 등에서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와 같은 스파이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2) ‘충녀’(1972)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등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과 품위 있는 외모로 ‘한국의 그레고리 펙’으로 불렸던 그는 미남 배우의 역설을 경험했다. 당시 주류를 이뤘던 소위 말하는 건달 영화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좋은 배역을 맡지 못했다.
신상옥 감독이 그에게 “10년, 15년 너무 일찍 나왔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만약 남씨가 ‘벙어리 삼룡이’ 같은 토속적인 역할을 하려고 하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업’(1988)에 이르기까지 출연한 영화가 300편이 넘지만 배우로서 아쉬움이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들 학비 때문에 출연한 영화들
1980년대에는 상업적 멜로물에 많이 출연했다. 남씨는 2016년 11월 방송된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 그 이유를 “아이들 학비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우뢰매4-썬더브이 출동’(1987) ‘로보트 태권V 90’(1990) 등 어린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홍성아·정욱·나리 세 자녀는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스탠퍼드대 등 미국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아들 홍정욱 올가니카 회장은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등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룬 것이기도 하다. 남씨도 국회의원 공천을 받은 적 있다.
남씨는 YTN 인터뷰에서 “정치가 아주 혼란했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주위에서 나오라고 하는데 이럴 때 영화배우를 그대로 지켜야지, 조용히 있는 것도 내가 정치를 하겠다는 덕목이 아닌가 해서 포기를 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