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같이 살다 간 ‘천재 소녀’ 장덕의 스크린 외출

재능은 타고나는 것일까. 장덕의 불꽃 같은 삶을 돌아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빠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로 잘 알려진 그는 ‘가수 장덕’으로만 살기에는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28세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장덕은 가수는 물론 작곡가·작사가·프로듀서로 종횡무진 맹활약했다.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다. 1990년 2월 4일 장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슬퍼하며 그의 유작이 된 음반 <예정된 시간을 위해>를 학교 인근에서 샀다.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해서’는 여러모로 화제가 됐다.

가슴 아픈 이별을 노래한 발라드의 가사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오빠의 시한부 암 투병이 이유 중 하나로 제시됐고, 어릴 적 자살 소동까지 소환됐다. 물론 근거 없는 얘기다. 감기약과 수면제 등의 약물이 상호작용해 쇼크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유작이 된 음반 ‘예정된 시간을 위해’

가수 장덕의 어린 시절 모습
장덕의 어린 시절 모습

1961년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화가였다. 가정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가 이혼했다. 이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릴 적부터 오빠는 바이올린, 자신은 피아노를 배웠다. 초등학생 때 이미 작곡을 시작했고, 중학생 때 오빠와 듀엣을 결성해 미군 클럽에서 직접 작곡한 노래로 무대에 섰다. 얼마 뒤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방송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안양예고를 1년 빠르게 입학한 장덕은 작곡·작사가로 일찌감치 이름을 알린다. 1977년 고교 1학년 때 진미령에게 ‘소녀와 가로등’을 선사했다. 진미령은 향후 자신의 대표곡이 된 이 노래로 MBC 서울가요제에 출전해 입상했다.

1978년에는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 1979년에는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를 작곡·작사해 3년 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10대 소녀 장덕은 길옥윤·윤향기와 같은 당대 최고의 대중음악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고교 3학년 때 솔로 데뷔 음반 <첫사랑>을 발표하고 2년 뒤 ‘현이와 덕이’ 정규 1집을 선보였다. 여기서 공식적인 음악 활동을 잠시 멈춘다. 미국으 이민 간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유학행에 오른 것이다. 물론 음악에 손을 놓지는 않았다. 대학에서 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미국 현지 가수에게 곡을 주기도 했다.

장덕 떠올릴 때 가장 밝은 날, 그리고 남매의 죽음

정덕과 오빠 장현
장덕과 오빠 장현

미국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귀국해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정규 1집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해 방송을 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듬해 낸 정규 2집이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혼자 견뎌내야 하는 연예인 삶에 한없이 침체된다.

장덕의 재능을 되살린 건 오빠였다. 울산에서 활동하던 장현은 서울로 올라와 1985년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했다. 정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가 대박이 났다. 이듬해 장덕은 불후의 명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이은하에게 선물한다. 이은하가 쓴 노랫말에 애절한 곡을 입혔다.

1986년 솔로 정규 3집이 또 한 번 히트를 친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님 떠난 후’가 담긴 동명 음반이다. 이 노래로 장덕은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해 골든컵을 수상했다. 장덕을 떠올릴 때 가장 밝은 날들로 기억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승승장구하던 장덕은 예상치 못한 사태로 위기를 맞게 된다. 새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해> 발매를 앞둔 1989년 6월 오빠 장현이 설암 3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음반은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병간호를 위해 가수 활동을 중단했고 이듬해 2월 세상을 떠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오빠도 그해 8월 동생을 따라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장덕의 삶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영화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불꽃 같이 살다 간 천재소녀 장덕은 음악뿐 아니라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슬픈 멜로디의 노래가 덧씌워진 잔상이 워낙 강하지만 영화 또한 그의 삶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장덕의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먼저 발견한 건 영화계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시절 남매 듀엣이 불렀던 ‘꼬마인형’ ‘일기장’이 당대 최고 청춘스타 임예진·이덕화·전영록 주연 영화 <푸른교실>에 실린 것이다.

배우로 영화에 출연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고교 1학년 때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을 맡았고, 오빠 장현이 임예진과 주연을 맡은 <선생님 안녕>에 동생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에는 ‘현이와 덕이’의 노래 ‘정말’이 실렸다.

고교 2학년 때에는 하이틴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1970년대 청춘영화를 주도한 3명의 감독 김응천·석래명·문여송이 감독한 옴니버스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1화 주연을 맡은 것이다. 상대 배우는 아역 스타 출신 ‘꼬마 신랑’ 김정훈이었다.

1984년에는 이미례 감독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김진아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청소년 비행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의 작품은 136개. ‘현이와 덕이’ 앨범 4장, 솔로 음반 9장, 참여 음반 33장, 그리고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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