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떠올리는 영화 ‘소나기’ 40년 만에 다시 보다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1980년대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중장년층에게 ‘소나기’는 어렴풋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을 영화화 한 고영남 감독의 ‘소나기’를 다시 봤다. 1979년 9월 개봉한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1983년 11월 KBS TV 한국영화걸작선을 통해서다. 소설을 읽기 전 영화로 먼저 만난 셈이다.

단편소설을 1시간 40분짜리 장편영화로 만들었으니 소설에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가 제법 등장한다. 원작과 달리 이름을 갖게 된 소년 석이와 소녀 연이의 꿈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소설보다 먼저 만난 영화 ‘소나기’

원작 소설의 담백한 맛이 덜한 반면 영화는 그 시절 소년·소녀로 몰입하게 만든다. 시도 때도 없이 ‘시골길’을 부르며 쿨한 척 하는 소년 석이, 개울 외나무다리에서 물놀이를 하며 ‘깔깔깔’ 웃는 소녀 연이. 어린 시절 나일 수도 동무일 수도 있다.

영화는 소설의 기본 스토리를 충실하게 따라간다. 마을 소년 석이와 서울서 전학 온 윤 초시네 증손녀딸 연이가 친해지는 과정, 산에서 놀다가 소나기를 만나 수숫단 속에서 비를 피하는 장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통해 연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석이….

다만 소설은 연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아버지의 대사로 끝나는 반면, 영화는 다음날 개울을 찾아 슬퍼하는 석이 큰 소리를 지르며 언덕길을 뛰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어릴 적 TV로 <소나기>를 본 후 아버지의 대사 중 ‘잔망스럽다’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연이가 죽거든 자기가 입던 윗도리와 붉은 치마(소설에서는 그냥 옷으로 나온다)를 꼭 입혀달라고 했다는 게 잔망스럽다고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잔망스럽다는 ‘보기에 몹시 약하고 가냘픈 데가 있다’ ‘보기에 태도나 행동이 자질구레하고 가벼운 데가 있다’ ‘얄밉도록 맹랑한 데가 있다’ 등의 뜻을 지닌 형용사다. 연이의 경우 마지막 ‘얄밉도록 맹랑한 데가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영화계 떠난 소년 이영수와 소녀 조윤숙

영화에서 소년 석이를 연기한 배우 이영수는 <소나기> 외에도 같은 해(1979년) 개봉한 <골목대장>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단짝> 등에서 주연을 맡아 아역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이후에도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다. <88짝궁들>(1984)에서는 배우 윤유선과 함께 주연을 맡았고, <사랑스런 이웃집 여자>(1991)에서도 주인공을 연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7년 7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스포츠조선 보도에 따르면 당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소녀 연이를 연기한 배우 조윤숙은 <소나기>를 촬영했던 1978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고 한다. 출생년도를 보면 이영수와 동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윤숙의 아버지가 당시 은행지점장으로 재직 중이어서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영화 속 연이의 이미지와 잘 맞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하늘나라 엄마별이>(1981)에 주인공 김민순으로 출연한 후 배우로서 활동을 그만뒀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그는 교수 집안 자제와 결혼한 후 해외로 이민 간 것으로 알려졌다.


소녀가 떠난 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

소설 ‘소나기’는 소녀의 죽음을 알리는 아버지의 대사로 끝난다. 모두 궁금할 거다. 그 이후 소년은 어떻게 됐는지.

황순원 작가 탄생 100년을 맞은 2015년 <대산문화> 여름호에 경희대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 5명이 기고한 단편소설이 실렸다. 바로 ‘소나기’ 뒷 이야기다.

영화 소나기의 소년이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 다음날 개울 외나무다리에 앉아 슬퍼하고 있다.
영화 소나기의 소년이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 다음날 개울 외나무다리에 앉아 슬퍼하고 있다.

당시 <대산문화>에 실린 소설은 구병모의 ‘헤살’, 전상국의 ‘가을하다’, 서하진의 ‘다시 소나기’, 이혜경의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박덕규의 ‘사람의 별’ 5편이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5편의 단편소설 내용은 이렇다.

‘헤살’에서 소년은 며칠을 까닭 없이 앓다 일어나 학교에 가려 집을 나서지만 소녀와 추억이 어린 개울 징검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징검다리는 늘 그대로다. 달라진 건 소녀가 없다는 것뿐이다. 며칠을 징검다리 앞에서 돌아섰던 소년은 소녀를 업을 때 입었던 저고리를 개울에 떠내려 보낸 후에야 징검다리를 건넌다.

‘가을하다’는 소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이야기다. 소년은 중학생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서 소녀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소녀와의 추억을 되새기다 짙은 감색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담임선생님 얼굴이 겹쳐져 혼란스럽다. 소년은 그동안 모은 조약돌을 물수제비를 떠서 버리지만, 소녀가 던졌던 조약돌 하나만은 남겨둔다.

‘다시 소나기’는 3년 뒤 이야기다. 소년은 소녀가 그리울 때면 소녀의 무덤을 찾아간다. 소녀는 이곳에 분홍 스웨터를 입은 채 잠들어 있다. 어느 날 소녀를 빼닮은 여학생이 같은 반으로 전학 온다. 소녀의 동갑내기 사촌이다. 둘이 함께 하는 하교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은 좀 더 시간이 흐른 10년 뒤다. 도시의 공장 노동자가 된 소년은 동료들이 보던 잡지에서 소녀를 닮은 여학생 사진을 본다. 소년은 잡지에서 사진을 찢어 작업복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시간 날 때마다 꺼내 본다. 어느 날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 빨래를 하는 바람에 사진은 부스러기가 돼 흩어지고 만다.

‘사람의 별’은 소녀의 시점에서 본 ‘소나기’다. 먼 별에서 살다 지구인으로 다시 태어난 소녀는 소설 마지막 부문에서 자신을 데려가려는 큰 새의 등에 실리기 전 소년과의 추억이 어린 스웨터를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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