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첫사랑 계보…당신에겐 누가 있나요

영화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추억 속 그 시절로 나를 데려다준다. 영화를 본 그때 그 감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릴 적 본 영화는 어린 나의 감성이, 나이 들어 본 영화는 나이든 나의 감성이 그대로 전해진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처럼 영화를 통해 이른바 ‘국민 첫사랑’으로 불린 여배우들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성격이 바뀌기는 했지만 순수함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사랑에 서툰 청춘의 아픔을 되살려준다.

‘진짜 진짜’ 시리즈 임예진

1970년대는 임예진의 시대였다. 문여송 감독의 ‘진짜 진짜’ 시리즈에 여주인공을 나와 하이틴 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다. <진짜 진짜 잊지마>(1976) <진짜 진짜 미안해>(1976) <진짜 진짜 좋아해>(1977)로 이어지는 ‘진짜 진짜’ 시리즈를 통해 임예진은 ‘국민 첫사랑’으로 청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진짜 진짜 잊지마>와 <진짜 진짜 미안해>에서 상대역은 당대 최고 청춘스타 이덕화가 맡았다. 영화 촬영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연예지에서 이덕화와 임예진 사이에 뭔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자 임예진의 어머니가 직접 촬영장에서 이덕화를 감시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은 임예진의 어머니가 이덕화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으며 딸을 보호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3부작 중 <진짜 진짜 좋아해>에는 이덕화가 출연하지 않았다. 오토바이 사고로 중상을 입어 촬영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대신 문여송 감독의 <아무도 모를 거야>에서 호흡을 맞춘 김현(본명 김상범)이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김현은 1974년 ‘아도니스’라는 그룹을 결성해 리드보컬을 맡으며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 그러다 문 감독 눈에 들어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임예진은 ‘진짜 진짜’ 시리즈 외에도 당시 하이틴 영화를 휩쓸다시피 했다. 1976년에 <소녀의 기도> <너무 너무 좋은 거야> <정말 꿈이 있다구> <이런 마음 처음이야>, 1977년에 <이 다음에 우리는> <첫눈이 내릴 때> <선생님 안녕> <우리들 세계> <아무도 모를거야> 등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이미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주인공 이미연과 허석(김보성)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주인공 이미연과 허석(김보성)

1989년 개봉한 영화 한편이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0대 학생들의 항변과도 같은 제목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성적지상주의에 빠진 우리 사회를 아프게 꾸짖었다.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에서 이미연은 반에서 1등만 하다 성적이 떨어지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옥상에서 투신하는 은주역을 맡았다. 김보성(허석)이 은주를 좋아하는 봉구, 김민종이 가난한 복서 창수역을 맡아 이들의 데뷔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서 이미연은 고1 때인 1987년 미스 롯데로 선정돼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 시절 최고 인기를 누리던 청춘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간호사역으로 출연해 흔히 얘기하는 청순가련의 상징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하이틴 스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국민 첫사랑’으로 당시 중·고교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책받침 모델 1순위였다.

‘클래식’ 손예진

클래식(2003) 주인공 손예진과 조인성
클래식(2003) 주인공 손예진과 조인성

고3 때인 1999년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2001년 그가 나온 한 음료 광고가 히트를 치면서 청순 미녀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드라마 <맛있는 청혼>에서 주인공을 맡아 청순한 이미지와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손예진은 영화 <연애소설>(2002)에 이어 개봉한 <클래식>(2003)에서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동시에 안겨주며 국민 첫사랑으로 자리잡았다.

연극반 선배 상민(조인성)을 좋아하는 지혜 역과 1968년 여름 준하(조승우)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헤어지고 마는 젊은 시절 엄마 주희 역을 모두 맡아 첫 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건망증이 심한 수진 역을 맡은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는 가슴 설레는 로맨스와 슬픈 멜로의 주인공이 된다. 운명처럼 만난 철수(정우성)와 결혼하게 되지만 건망증이 심해 병원을 찾았다가 자신의 뇌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대…”라는 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건축학개론’ 수지

건축학개론(2012) 주인공 수지와 이제훈
건축학개론(2012) 주인공 수지와 이제훈

2010년 미쓰에이 멤버로 일찌감치 연예계에 데뷔한 아이돌 출신으로 본명은 배수지다. 가수로 시작했지만 이듬해 드라마 <드림하이>에 출연하면서 배우 생활도 병행했다.

특히 2012년 개봉한 <건축학개론>에서 대학 시절 서연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현재 서연(한가인)의 15년 전 모습으로 영화 포스터에 담긴 카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에 딱 들어맞는 외모와 연기를 보여줬다. 수지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상대역 대학생 승민은 이제훈이 맡았고, 현재 승민 역은 엄태웅이 연기했다. 두 배우는 연애에 소심하지만 열등감에 욱하는 기질이 있는 승민의 내면을 잘 연기했다. 이제훈과 수지는 10살 차이가 나지만 영화 속에선 전혀 어색함이 없다.

시인 장정일이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해 쓴 단편소설 <아이>(1990)에는 ‘첫사랑’에 대해 논쟁을 펼치는 동생들이 나온다. 이데올로기적 분석을 걷어내고 단순화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

흔히 첫사랑은 이뤄질 수 없다고 하는데,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첫사랑이다. 만약 이뤄졌다면 그건 첫사랑이 아니라 그냥 사랑으로 불렸을 거다. 첫사랑은 두번째·세번째 사랑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첫사랑의 대상은 모호하고 아련하다. 때로는 짝사랑이 첫사랑이 된다. ‘국민 첫사랑’도 이런 측면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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