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왕정문과 왕비 그리고 왕페이
왕가위 감독에게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1989년 개봉한 <열혈남아>(旺角卡門)부터 1995년 개봉한 <동사서독>(東邪西毒)까지다. 그 사이에 <아비정전>(阿飛正傳·1990)과 <중경삼림>(重慶森林·1995)이 있다.
장국영과 양조위가 주연을 맡은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1998)도 괜찮았지만 왕가위 감독의 이전 영화와 감흥이 달랐다.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가 만들어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라는 점에서 시대의 흐름에 타협한 관객의 변심일 수도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극장가는 홍콩 느와르 전성시대였다. 검정색 롱코트에 쌍권총을 든 주윤발과 선홍색 피를 흘리며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유덕화는 코믹 무협의 대가 성룡에게 길들여진 ‘홍콩 키드’에게 신세계로 다가왔다.
홍콩 느와르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다보니 속편에 그 속편까지 비슷비슷한 스토리의 작품이 쏟아졌다. 그 시절 왕가위 감독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관객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다작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영화를 글 한편으로 정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 글은 두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중경삼림>, 그 중 두 번째 에피소드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왕비(王菲)에 관해서다. 영화에서 페이역을 맡은 그는 당시 왕정문(王靖雯)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기억 속 페이는 한동안 왕비가 아닌 왕정문이었다.
하지만 왕정문이라는 예명이 탐탁지 않던 그는 이후 왕비라는 본명을 되찾았다. 대중에게는 영어 이름 왕페이(Faye Wong)가 더 익숙하다. 국내 언론도 언제부턴가 그를 왕정문이나 왕비가 아닌 왕페이로 불렀다. 기억이라는 놈은 지조가 없다. 이제 영화 속 페이는 왕정문도 왕비도 아닌 왕페이로 남는다.
가장 왕가위다운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중경삼림>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별의 고통과 만남의 낯섦을 세련되게 다룬 로맨스 영화로, 누군가는 곧 중국으로 반환될 처지에 놓인 홍콩의 정체성 혼란을 묘사한 사회성 짙은 영화로 기억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영화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왕페이를 떠올린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주인공 금발머리 마약 밀매상으로 나온 임청하의 연기 경력과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왕초짜 배우지만, 세상 다 산 듯한 특유의 무심한 표정 너머 절망과 욕망이 뒤섞여 부유하는 젊은 날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사실 왕페이를 배우로 부를 수 있을 지부터 의문이다. <중경삼림>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지만 이후 배우로서 제대로 된 활동은 거의 없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했다. 왕가위 감독과 배우 장국영 등의 인연으로 영화 몇 편에 더 출연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왕페이는 뼛속까지 가수다. 작사·작곡에 프로듀싱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다. 연기를 멀리했던 그는 이후 중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우상이던 ‘첨밀밀’의 등려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말 그대로 국민 가수가 됐다.
파격적인 패션과 당당한 태도 등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어쩌면 영화 출연도 그에게는 일종의 외부 활동이었을 수 있다. <중경삼림>에 출연하게 된 계기도 인상 깊게 본 <아비정전>의 왕가위 감독이 캐스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페이는 <중경삼림>의 주제곡 ‘몽중인’(夢中人)을 직접 불렀다. 제목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의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좋은 영화의 좋은 음악’으로 손색이 없다. 그는 <중경삼림> 외에도 여러 영화의 주제곡을 불렀다. 인기 게임 ‘파이널 판타지 8’의 ‘Eyes on Me’를 부르기도 했다.
왕페이는 20개가 넘는 정규 앨범을 낼 정도로 열정적인 음악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페이’를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30여 년 전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라 보게 된 <중경삼림>을 기억하면서 왕페이를 먼저 떠올리는 건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깨닫게 해줘서 일지도 모른다.